종로의 세운상가
이곳역시 사람들마다 각자의 추억이 담겨있는 곳이다.
이 지역은 일제시대부터 소개공지대(전쟁 중 발생한 화재가 주변으로 번지는 것을 막기위해 비워놓는 공간)였는데 너비 50m 길이 1km가 비워졌었으니 이후 이재민 판자촌으로 슬럼화되기 딱 좋은 공간이었다. 이곳을 "난공불락의 윤락가이며, 서울의 불명예스런 명물의 하나로 손꼽히던 종삼지대"라 하며, "탕아들의 유락장, 우범청소년들의 소굴이던 도심지의 불결한 치부"라고 일컬어 졌던 지역이었다.
서울시는 이 곳을 개발하고자 1960년대 중반 해당 프로젝트에 대한 계획을 세우고 상가와 주택이 함께 조성된 지금으로 생각하면 최초의 재개발 사업을 시행하였다. 당시 최고의 스타 건축가였던 김수근이 설계를 맡았다.


처음 김수근의 계획은 차도와 보행로를 완전히 분리하기 위해 지상은 차도와 주차장만으로 구성하고, 2~4층을 상가로 구성한후 8개 동의 3층을 모두 보행로로 연결되게끔 하는 것이었다고 한다. 또한 상가의 옥상이자 주거의 시작인 5층에는 인공대지를 만들어 입체도시로 설계하려 했다. 하지만 6개 건설사와 8개 사업체가 시공을 하던 이 계획은 모두 실패로 끝났다. 1층도 상가가 들어섰으며, 인공대지 계획도 변경되었다. 사실 사업성이 더 중요했던 시대이니 건축가의 설계가 애초에 다 담길수 없었겠지만 이는 김수근으로 하여금 큰 상처로 남았다고 할 정도이다.
그러다보니 최신식 건물과 수많은 전자업체들로 가득차 불야성을 이루고, 도시의 대표건축물로 불리던 것과 달리 건축계에서는 계속 비판의 대상이 되어 왔다. 1) 서울은 동서 방향으로 흐르는데 남북을 길게해서 도시를 차단하는 모습을 보이고, 2) 남북방향의 보행자와 차량은 많지 않아 애초에 보차도 분리발상이 잘못 되었고, 3) 3층에 보행로가 연결되지 못하니 사람들이 계단을 오르내리는 불편함이 있다는 지적이 계속 된것이다. 이렇게 애물단지가 되는데는 불과 10년도 걸리지 않았다.
물론 추후 애물단지가 되었지만 준공초기의 압도적인 크기와 모여드는 상인과 사람들의 발길은 이곳을 명물로 만들기에 충분했다. 1967년부터 1972년까지 순차적으로 7개 동이 지어졌고, 1981년 마지막으로 풍전호텔이 지어졌다. 그당시 세계에서 최고규모를 자랑하던 하와이의 알라모어 쇼핑센터보다 컸다고 하니 엄청난 규모였음을 짐작할 수 있다.
그렇지만 신축효과가 지나며 상권은 명동으로 부동산은 강남으로 전자/기계의 명소는 용산으로 각각 역할을 다 빼앗기며 그저 "추억의 장소", "왕년의 장소"가 되어버리고 말았다.



원래 재개발 이야기도 있었지만 리모델링과 재생과정을 거치며 지금의 모습으로 탈바꿈했다. 50여년간 방치됐던 옥상을 서울 스카이라인을 보는 관광공간으로 개방했고, 스타트업 전용공간인 '세운메이커스 큐브'를 만들기도 했다. 또한 세운상가에서 퇴계로 진양상가까지 모든 건물이 공중보행길로 연결되어 최초 건축가 김수근이 꿈꾸던 이상에 한층 가까워졌다.
최근 힙지로 열풍을 타고 많은 젊은 사람들이 모여들고 있다. 다만 노후한 주거시설과 인근 정비의 문제로 아직 완전한 재생이 이루어졌다고는 볼 수 없다. 무조건 개발이 능사도 아니고 또 그렇다고 무조건 보존하는 것만이 능사도 아닐 것이다. 이 안에서 도시계획이 절충을 이루어 좀더 편리하고 안정된 삶을 살아가는 과정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개발과 보존이 목적이 되지는 않았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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